2014.09.24 11:28
문명을 비교하기 전에, 문명이란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에 상대하여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양태를 뜻한다.’라고 나온다. 서양의 최초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다.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문명은 아니지만, 유럽에서 발생하게 될 여러 문명들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서양문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는 ‘비옥한 삼각주’에서 탄생했다. 문명이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농업이다. 메소포타미아의 경우 관개시설을 이용해 평원에 물을 댈 수 있었기 때문에 농업이 성공할 수 있었고 인구가 급증하여 도시가 발생하고 문명이 꽃피울 수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현세적인 다신교를 믿었고, 어둡고 비관적인 사후 세계관을 가졌다. 이를 보여주는 점이 홍수 설화나, 인류 최초의 문학으로 꼽히는 길가메시 서사시이다. 이들의 사후 세계관은 장례 절차가 짧은 등 실용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또 대도시가 발달하고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다. 지세가 개방적인 탓에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면도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법치국가라는 점이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기원전 1800년 경 탄생한 최초의 성문법이다. 상업에 관한 법이 많은 점이 상업이 번성했음을 보여준다. 신분에 따라 처벌의 정도가 달랐지만 받은만큼 돌려주는 법이 특징이다. 또 하나 특별한 점은 여성의 이혼과 재산소유를 인정하는 등 동시대의 다른 문명들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여성의 신분을 인정했다. 또 인류 최초의 수메르어를 발명하고, 설형문자를 발명했다. 이밖에도 10진법과 태양력 등 과학기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집트문명은 나일강을 끼고 탄생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는 다르게 관개시설이 문명발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범람지였기 때문에 농사가 잘되었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폐쇄적인 지형을 가졌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다. 이는 ‘왕은 곧 신이다’라는 람세스2세의 말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이곳의 왕은 파라오라고 불렀다. 군주제가 워낙 강력하였기 때문에, 파라오가 거주하는 곳이 도시로 발전하기 마련이였다. 밝은 사후세계관을 가진 점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다른 점이다. 그들은 현세의 선한 삶이 죽어서도 지배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도덕과 윤리를 중시하였다. 이집트 문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거대한 피라미드의 이면에는 부역에 시달렸던 농민들이 있다. 이들은 예농이라 불렸는데, 사회계층 중 최하층이었다. 이집트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뒤지지 않게 의학이나 화학, 수학 등 여러 학문이 발전하였다. 또한 신성문자를 발명하고, 파피루스를 발명했다.
기원전 3천년 즈음에 에게해에서도 문명이 싹트기 시작했다. 에게문명의 두 개의 큰 흐름은 크레테 문명과 미케네 문명이다. 크레테 문명은 미노스 문명, 미노아 문명으로도 불린다. 이 문명의 재미있는 점은 전쟁을 치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번영을 누릴 수 있었고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누리게 되었다. 또 상업이 잘 이루어져 많은 부를 쌓았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코노소스의 미궁이 있다. 크레테의 전설 중에는 미노타우르스 전설이 있다. 반인반수인 괴물이 있는데, 그것의 이름이 미노타우르스고, 그 괴물을 미궁 속에 가두었다는 내용이다. 이 전설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크노소스의 미궁이다. 아름답게 꽃피던 문화는 기원전 1450년경 침공한 미케네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미케네문명은 기원전 1600년경부터 나타난 문명이다. 크레테문명을 파괴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호전적이고 어두운 분위기의 문명이었다. 많은 연구들이 미케네인이 관절염에 많이 시달렸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미케네 문명이 무거운 무기를 많이 드는 전사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이들의 대표적인 유산중 하나가 호메로스의 서사시인데, 아가멤논 대왕이 나오는 작품이다. 미케네문명이 어두운 분위기라는 점을 이 서사시도 잘 보여준다.
그리스 문명은 미케네 문명이 쇠퇴하면서 준비되기 시작했다. 그리스는 여러개의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졌다. 그 중 가장 번성했던 도시국가가 바로 아테네이다. 아테네가 부상하기까지 많은 개혁가들의 손을 거쳤다. 드라콘은 법전을 만들어 만인에게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는 법을 구축하였고, 솔론은 평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부당하게 노예가 된 평민들을 구제함으로써 평민의 권리를 회복시켰다. 게다가 가벼운 주화를 만들어 무역과 상업을 장려했다. 또 피시스트라토스는 사유지를 해체하여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공공사업을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런 문화의 장은 사람들을 민주주의로 이끌어 나갔다. 그 후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아테네는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유를 지켜나갔다. 페르시아 전쟁을 이겨낸 힘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여러 철학자들이 등장하여 철학의 기본을 완성시켰다. 당시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의 번영과 민주주의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로마가 탄생했다. 로마는 원래 작은 도시국가였다. 조그마한 도시국가가 세계의 1/5를 지배하는 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로마의 정신을 꼽는다. 엄격함, 규율, 용기, 애국주의, 소박, 검소, 모방 등을 꼽는다. 그중 눈에 크게 띄는 것이 모방이다. 모방을 통해 로마는 여러 문화를 흡수할 수 있었다. 또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모방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하였다. 또한 로마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법아래 조화로운 규율, 스토아 철학, 세계 공동체 사상, 부도덕과 부패 속에서의 개별적인 도덕적 투쟁 등이 있다. 또한 목욕문화로 대변되는 전쟁, 정복 등 폭력성도 로마를 보여준다. 로마의 또다른 특징은 공화정이다. 공화정의 핵심은 권력의 상호 견제와 균형이다. 실제로 원로원, 정무관직, 민회가 서로를 감시하며 균형을 이루었다. 그 결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건강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민회는 처음에는 없었다는 점이다. 평민 계층의 지속적인 투쟁으로 권리를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귀족들이 자신의 권리를 평민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를 존중하고 단합하는 시민 의식에서 로마 팽창의 힘이 나온 것이다. 민회 중에는 Centuria민회(병사회)가 있는데, 특징은 무장의 정도에 따라 들어가는 그룹이 달랐다. 그룹의 레벨 따라 투표 순서도 차별적으로 주어졌는데, 당시 무장은 자비로 해야 했기 때문에, 중무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즉, 유산시민을 존중하였다.
로마에는 로마법이 있었다. 12표법은 가부장적이고, 부채 노예제를 선택했다. 7표 범죄에 관한 법률을 보면, 곡식을 훼손할 경우 최고 교수형에 처하고, 곡물이나 건물에 불을 지르게 되면 채찍질 후 화형에 처했다. 또 공개적으로 비방하였는데 무고함이 밝혀질 경우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였다. 이런 면들은 당시 사회의 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로마가 엄격한 법치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제정 후 평민의 권리가 커지면서 6년 만에 평민과 귀족의 결혼을 허용하도록 법을 바꾸고, 그 뒤에도 로마시민의 채무노예제를 폐지하는 등 개정을 한다. 이는 사회실정에 따라 법을 바꿀 수 있는 로마인의 실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기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이번 겨울에 유럽여행을 가려고 준비하면서이다. 사실 그 전에는 그냥 상식을 쌓는다고 생각했지만, 역사가 이렇게 나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생기니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번 여행에서 그리스는 못가지만, 이탈리아는 꼭 들를 생각이다. 고대 유럽의 역사의 핵심은 바로 로마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뿌리는 그리스라고 하지만, 나는 그리스만큼이나 로마가 유럽역사에서 더 큰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한다. 그리스가 사람들의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면, 로마는 유럽 사람들의 물질 문명에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로마인들의 실용정신으로 만들어낸 수도관이나 도시설계 등이 대표적이다.